1, 요약
1) 만고충신 박제상과 돌이 된 여인
“나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나를 다시 볼 기약을 하지 마오.” 148p
신라의 17대 내물왕이 즉위한지 36년 경인년(390년)에 왜왕이 화친을 제의하며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화친의 뜻으로 왕자 한명을 보내 달라 청했다. 고민 끝
,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典籍)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띤다.
우리는 내물왕과 박제상에 관한 일화를 두 사료를 통해 분석하고 비교해 보면서 어느 것이 더 역사적 타당성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부인이니 (이는) 지마왕의 딸이다.
원년 3월에 계원으로 이찬을 삼아 군국정사를 맡겼다.
2년 정월에 (王이) 친히 시조묘에 제사하고, 죄수를 대사하고, 흥선으로 일길찬을 삼았다.
3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의 길을 열었다
4년 2월에 감물 마산의 이현을 처음으로 두었다. 3월에 (王이)장령진을
박제상(朴堤上)이 볼모로 잡혀 있는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러 왜국에 갔다가 왕제(王弟)는 구하여 귀국시켰으나, 자신은 왜왕(倭王)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박제상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隧述嶺:울산 ․경주 경계에 있는 재)에 올라가 슬픔과 그리움에 겨워 통곡하다가
박제상과 부인 이야기」, 「김현감호」
(2) 애정비극 소설의 기원으로서의 양자 희생형 서사 : 「조신전」, 「최치원전」
(3) 혈육의 죽음을 노래한 향가 : 「제망매가」
Ⅳ. 『삼국유사』에 나타난 문학(향가)과 권력의 관계 ‥‥‥‥‥‥‥‥‥‥‥‥‥‥‥‥
1. 노래의 새로운 모습 : 향가
2. 향가의 작
박제상 이야기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등장했었던 충신이었다. 왕의 동생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고 왜로 간 것도 대단하지만 일부러 집에 들리지 않고 곧장 왜로 갔던 그 행동 또한 대단하다. 하물며 망부석이 될 때까지 울었던 그 부인의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귀신과 사람
문화유산 역사지리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전통에 따라 역사문화적으로 다양하고 의미있는 문화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분들에게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 발표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문화재를 소개하고 싶은지 2개의 문화재를 특별히 선정하여 그 이유와 의미를 설
박제상’을 추천했다. 이에 눌지왕은 기뻐하여 박제상에게 신하를 보냈다. 박제상을 만난 신하는 어명을 전하고 곧, 박제상은 대궐로 눌지왕을 만나러 갔다. 눌지왕은 박제상에게 두 아우를 구해주라 부탁을 하였다.
임금의 어명을 받은 박제상은 다음 날 새벽 일찍 길을 재촉하여 고구려로 갔다. 박제
부인 사씨와 그의 남편은 사실 금슬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사씨가 오랫동안 임신을 하지 못하자 사씨는 남편의 고모 두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첩으로 교씨를 남편에게 추천합니다. 편은 교씨의 아름다움에 빠졌고
교씨는 점점 교만해져가며 아들을 낳은 후엔 끝내 남편의 총애를 믿고 사씨를 자주
하는데, 이 일로 문단 안팎의 거센 비난을 받는다. 2000년 10월에 부인이 사망하고, 뒤이어 12월 24일 별세한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자체 조사하여 발표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자 1차 명단에 포함되었다.
2. 작품 경향과 변모 과정 (발간 시집 ① 화사집(1941)
② 귀촉도(1948)